생활스포츠 지도사 보디빌딩 심화학습 05. 한국 보디빌딩의 역사

2024. 7. 7. 12:43생활스포츠지도사 2급 보디빌딩

반응형

문곡 서상천. 한국 보디빌딩의 아버지. 가운데 정장을 입은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대한민국 보디빌딩 역사의 시초

한국 보디빌딩의 뿌리는 역도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는데, 역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근대적 체육이 도입된 시기에 시작된다. 세계 보디빌딩이 스트롱맨에 기반을 둔 것과 유사하게, 역도를 수행하는 '역사'였던 서상천(1902년 대구 출생)이 한국에 보디빌딩을 시작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곡은 작가를 겸했던 서상천의 필명이고, 그에 따라 그는 일반적으로 문곡 서상천으로 불린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대중을 위한 사회체육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1906년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 설립된 기독교계 중등 사립학교인 선천 신성학교에서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친다. 이 당시 역도는 실제 한국에 존재했으나 해외 보디빌딩에 대한 정보나 문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보디빌딩과 역도의 유사점을 근거로 보디빌딩과 문곡 서상천을 연구한 학자(황옥철 등)에 의해 보디빌딩이 역도로부터 분화했을 것이라는 주장만 남아있다. 그는 1930년 자택에 도장을 건설하여 '중앙체육연구소'라 명명하고 조선체력증진법연구회를 이에 흡수 시킨다. 역도라는 명칭은 서상천에 의해 개명된 것인데, 그 전에 역도는 역기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체육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도덕생활에까지 연결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1936년 역기(역도 기술)을 역도(역도를 훈련하는 길)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1938년 자신이 창설한 역도연맹 회장을 역임히고, 1946년에는 대한 씨름 협회 회장을 맡는다. 다만, 서상천과 다른 역사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그들에 훈련 루틴에 사용한 것은 맞으나 정확한 의미의 보디빌딩을 수행한 것에 대한 증거는 제시된 바 없다.

2. 광복 이후 한국 보디빌딩

1945년 광복 이후, 대한 역도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그 연맹의 설립 이유, 시기, 설립자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역도 연맹의 하위 위원회에는 보디빌딩 분과 위원회가 존재했다. 문곡 서상천은 체육인으로서 '현대일보'를 창간하고 일제침략으로 쇠운에 빠진 민족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의지를 가진 젋은이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역도를 보급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이때부터 국내외 보디빌딩과 관련된 모든 이벤트는 보디빌딩 분과 위원회에 의해 개최되고 관리되었다. 1949년 12월 4일 최초의 보디빌딩 대회인 '미스터 코리아'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한국 보디빌딩 대중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는 조순동(YMCA)이었고, 당시는 체급이 없었던 시기이고 유일한 종목인 일반부 경기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학자에 의해 연구된 문헌에는 최초 보디빌딩 대회의 정확한 개최 장소에 대한 일치된 정보가 없다. 같은 논문 내에서도 서울 시청, 명동 극장, 서울 시공관 등 때마다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 보디빌딩 협회에는 최초의 보디빌딩 대회 개최 장소를 서울시공관으로 명시하고 있다. 1950년 625 사변 때 문곡 서상천이 납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50년대에 들어 일반부와 학생부가 분리 개최된다. 

 

3. 1960~1970년대 한국 보디빌딩

1960년대에는 더 많은 미스터 코리아 대회가 열렸고, 신장 168cm를 기준으로 단신부 및 장신부 두 체급이 생겼다. 신장에 대한 몸무게로 나뉘던 체급은 점차 변화하고 국제 기준에 맞춰지게 된다. 이 시기에 대학 보디빌딩 또한 성장하게 된다. 1968년, 한국 보디빌딩 분과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IFBB의 회원이 된다. 

1970년대 많은 선진국은 스포츠 정책을 개발했고 한국 또한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한국 정부가 체육 연구 및 시민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 홍보에 투자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 장비의 국가적 제조가 시작된다. 1970년 한국 보디빌딩은 아시아 보디빌딩 피지크 연맹(Asian Bodybuilding and Physique Sports Federation, ABBF)에 가입하고, 이전에 도장 또는 체육관이라 일컬어지던 장소는 헬스클럽이라고 불리게 된다. 과거 보디빌딩이란 의미는 육체미라는 어휘로 사용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보디빌딩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다. 미스터 코리아 참가자 숫자가 증가하고, 한국 보디빌더들은 아시아 전역의 보디빌딩 챔피언쉽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이때문에 1970년대는 한국이 진정한 국제 보디빌딩계로 진출한 해로 여겨진다. 1970년에는 미스터 유니버시티 대회(the Mr. University Contest)라는 이름으로 대학부 보디빌딩 챔피언쉽이 대한 역도 연맹의 주최 및 중앙대학교 진행으로 개최된다. 체급은 점차 세분화되어 밴텀급(65Kg 이하), 라이트급(70kg 이하), 웰터급(75Kg 이하), 미들급(80kg 이하), 헤비급(90kg 이상)으로 세분화된 것도 1970년대이다. 이렇듯 1970년은 보디빌딩이 스포츠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해가 되었다.

 

4. 1980년대 한국 보디빌딩

1980년, 우리나라에서는 전반적인 스포츠 영역이 발전하고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86년은 서울 아시안 게임이, 1988년에는 서울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체육관(헬스클럽) 뿐만 아니라 보디빌더의 숫자가 증가하던 시기였으며, 1987년 6월 16일에는 대한 보디빌딩 협회(대보협, Korean Bodybuilding and Fitness Federation, KBBF)가 출범하였다.

한국 보디빌딩의 발전 원인이 국가적 정책에 기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보디빌딩의 인기가 독자적으로 이루어졌고 정부의 지원이 있었던 시기와 우연히 겹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무엇이 맞든 간에, 보디빌딩이 이 시기 전후로 급속한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5. 1990년대 이후 한국 보디빌딩

1990년대는 보디빌딩이 더욱더 높아진 인기와 독자적인 스포츠 분야로 인정받는 시기로, 보디빌딩이 전국 체육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여러 국내 대학교는 보디빌딩부를 창립하고 최고 수준의 보디빌더를 전문적으로 훈련하는데 투자한다. 보디빌딩은 교양과목으로 자리 잡고 전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1995년 이후 대보협은 미스터 유니버시티와 춘계 대학생 대회를 매년 개최하기 시작했다. 용인대학교는 보디빌딩 프로그램을 수립하여 기준에 부합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보디빌딩이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끌면서, 1995년에는 여자 보디빌딩 경기 대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미 1983년부터 한국 여성 보디빌더들은 국제 대회에 출전 중이었다. 1996년에는 국내 최초의 혼성 보디빌딩 대회가 개최된다.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 보디빌딩은 지속적인 인지도를 쌓았고, 2000년 OCC총회에서는 보디빌딩이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데, 10월 3일에서 6일 사이에 부산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즈 보디빌딩 토너먼트에서 많은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며 한국 보디빌딩계의 황금기를 이끌어 낸다.

 

2016년, 통합보디빌딩협회가 창립되고, 2018년에는 대한체육회 관리단체가 지정되나 2019년 해제된다. 2020년 전후로 많은 유튜버들과 인플루언서의 등장으로 보디빌딩은 더욱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나, 다양한 운동법과 이론이 상충되고 인성과 약물 관련 이슈가 드러나기도 한다. 

 

 

출처)

대한 보디빌딩 협회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황옥철, 안성진. (2004). 한국 보디빌딩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한국 체육학회지 43 (6):43-52

Marcus Mosesson. (2018). Korean Bodybuilding_Cultural Hybrid or Instance of Cultural Homogenization?. Stockholm University

 

반응형